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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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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writers
내러티브 매거진 <에픽> 편집위원 문지혁 작가. 번역가. 장편소설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사자와의 이틀 밤』이 있다. 임현 작가.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중편소설 『당신과 다른 나』가 있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정지향 작가. 장편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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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libr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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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문제와 그 대책
이산화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동영상 속에서, 화려한 반팔 셔츠 차림의 젊은 미국인 관광객은 모래알처럼 작고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구슬이 가득 담긴 커다란 비닐봉지를 뒤집어 쏟으며 아주 해맑게 웃고 있었다. 폭포처럼 주르륵 흘러내린 구슬들은 물이 얕게 깔린 새하얀 바닥 위로 철벅철벅 떨어져 산 모양으로 쌓였다가 이내 무너져 내리며 주변으로 쫘악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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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족골은 어디인가?
이기호 롱보드를 배워보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것은 올해 3월 초순의 일이었다. 왜 롱보드였을까? 따지고 보면 그것 또한 다 망할 팬데믹의 영향이었다. 직장으로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는 개강은 했지만 학생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무슨 시즌 말미 한화 이글스 좌측 외야석 풍경 같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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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
서장원 밖으로 나가기 직전, 나는 건물 층계참에 서서 창밖의 해주를 바라보았다. 해주는 구형 소나타에 기대서 있었다. 품이 넉넉한 검은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고, 여름마다 고수하던 스타일대로 숱 많은 머리카락을 정수리 위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곧 해주가 나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어줬다. 걱정했던 것처럼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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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맨션
김혜진 10년 전, 순미가 처음 전화를 걸어온 그 밤을 만옥은 기억하고 있었다. 종일 세차게 비가 퍼붓던 날이었다. 늦은 밤에 걸려오는 전화가 대개 어떤 소식을 전해주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만옥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고, 한동안은 빗소리와 차 소리 같은 것들이 뒤엉킨 소음 속에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집 내놓으셨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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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선(線)
한정현, 『소녀 연예인 이보나』, 민음사, 2020+ 켄지 요시노, 김현경·한빛나 옮김, 류민희 감수, 『커버링』, 민음사, 2017 한설 소설집의 입구에 위치한 「괴수 아키코」를 펼쳐보자. 한때 시나리오를 공부했던 ‘그’는 돌연 행보를 바꾸어 1970년대 한국의 미디어 문화사에 대한 비평집을 출간한다. 김추자, 신중현, 김치캣, 어니언스, 투코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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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진 문장들, 곱씹어진 행간들
박유리, 『은희』, 한겨레출판, 2020+ 비마이너 기획, 하금철·홍은전·강혜민·김유미 글,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 기록집』, 오월의봄, 2019 오혜진 사람 이름이 곧 제목인 책 앞에서는 일단 긴장한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나 강영숙의 『리나』, 금희의 「옥화」나 윤재호의 다큐멘터리 「마담 B」처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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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읽기 전까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
셰릴 빈트, 전행선 옮김, 정소연 해제, 『에스에프 에스프리―SF를 읽을 때 우리가 생각할 것들』, arte, 2019+ 박문영. 『지상의 여자들』, 그래비티북스, 2018 손지상 1. 왜 「아기공룡 둘리」는 SF인가? 문제: ‘고양이, 두더쥐, 멧돼지, 바다코끼리, 박쥐, 흰긴수염고래, 사람’의 공통점은? 답은 ‘포유류’이다. 포유류라는 분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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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하나의 단단한 단위
유재영 “이거 어디에 나왔던 문장인지 기억나?” 제목을 붙이고 나서 내가 말했다. 동지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저은 다음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째 비가 그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건 그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그가 아는 걸 나는 대체로 몰랐다. 그는 아는 걸 말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를 믿는다. 얼마 전 미셸 오바마는 결혼 28주년을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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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벌레, 바이러스, 인간의 새로운 관계 맺기
김순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번진 이후 나는 두 권의 책을 샀다. ‘이끼’와 ‘미생물’에 관한 것이다. 이끼와 관계를 맺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귀로 듣는 것이다. 뿌리가 없고 몸과 머리만 있는 이끼는 잎사귀 안에 수많은 물주머니를 품고 있는데, 그 물주머니와 물주머니 사이를 흐르는 수로에서 아주 아름다운 소리가 들린다. 미생물은 30억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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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베트남전쟁, 그리고 나
이길보라 기억 하나 중학교 국사 시간이었다. 먼 옛날과도 같은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 철기시대를 넘어 고구려부터 시작해 여러 나라가 한반도에서 세워지고 무너졌다. 이후,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했다. 근현대사 파트였다. 각 대통령이 어떻게 자리에 올랐고 어떤 일들을 했는지 열거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이렇게 기술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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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의 공모자들
김민섭 1 대학원에서 근대사를 공부한다는 건 얼마나 자료를 많이 보느냐의 싸움이었다. 나는 100년 전에 나온 잡지와 신문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여기에 와서야 알았다. 창간호만 나오고 사라졌거나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것도 많았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나온 잡지와 신문이 1,000여 종이나 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연구할 가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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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남은 사람의 마음
정지향 도착했다는 기분 비가 많이 내렸다. 큰 우산을 골라 들고 나왔다. 조심해서 걸었는데 종내 운동화며 바지 밑단이 흠뻑 젖었다. 고려대에서 강의를 하는 선배에게 전날 미리 전화를 해두었다. 안암역에 내려 출구로 나오자 비를 피해 버블티 가게 천막 안에 선 선배가 보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셔츠에 면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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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identity
‘에픽(epic)’이라는 단어는, 명사로는 ‘서사시, 서사 문학’, 형용사로는 ‘웅대한, 영웅적인, 대규모의, 뛰어난, 커다란, 광범위한’ 같은 뜻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이 ‘epic’의 모음 ‘i’에 ‘i’하나를 덧붙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란, 서사란, 하나의 내[i]가 다른 나[i]와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생겨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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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창간 기념 특별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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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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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아주 귀여웠고 어렸기 때문에 인형을 보면 눈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눈알을 빼려고 했다
정지돈 운동은 그 대상을 없애도 존속하는 두려운 낯섦의 능력이다.—브라이언 마수미 엠은 누구인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나는 이러한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엠은 엠이다. 또는 엠은 엠이 아니다. 그러나 특정 경험을 통과하며 엠이 누구인지 묻는 것이 중요해졌다. 질문은 형식적이거나 통속적인 행위가 아닌 시급한 필요와 진지한 탐구의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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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념 '에픽 온라인' 3개월 무료 구독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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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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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奇談)
황정은 선인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얼굴이 싸늘해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밤이었다. 방범창과 외벽을 끊임없이 두들기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선인아. 선인은 숨을 삼킨 뒤 어, 하고 대답했고 즉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거실에 불이 켜 있었고 강희가 머리를 앞쪽으로 조금 기울인 채 적갈색 패브릭을 씌운 의자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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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사람
이주란 진짜 중요한 건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때 나의 기분이나 감정, 혹은 지금의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이나 느낌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의 감정이란 건 어느 정도 추측할 순 있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는 한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자신이 걸어온 삶의 회로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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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제네바
송시우 1 스위스 제네바와 대한민국 인천 사이에는 직항 항공노선이 없다. 국제연합 사무소가 있는 인권의 도시, 제네바로 가기 위한 한국 인권 옹호자의 여정은 그만큼 길고 피로하다. 스위스 취리히를 거치거나 인접 국가의 도시를 한 번은 경유해야 한다. 인권증진위원회 부지훈 사무관과 한윤서 조사관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경유 노선을 택했다. 독일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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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의 나라
김홍 내가 「이인제의 나라」의 초고를 쓴 지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갑자기 이인제의 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의 「이인제의 나라」는 6년 동안 열다섯 번 남짓 고쳐 쓰는 동안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다. 「이인제의 나라」가 지면에 발표되었다면 그 순간부터 「이인제의 나라」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퇴고할 필요가 없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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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는 책
김솔 * Libro Mudo : “저는 선생으로서 말하지 않는 책을, 학생으로서 냉정한 잉크병을 지녔지요.”-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수녀(Sor Juana Inés de la Cruz, 1651. 11. 12~1695. 4. 17). 그 책에 대해 소문을 듣거나 기적적으로 필사본을 직접 읽은 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그런 글을 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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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다시 썼을 때 우리가 엿보게 되는 것들
시노다 세츠코, 안지나 옮김, 『장녀들』, 이음, 2020+ 리베카 솔닛, 김현우 옮김,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임지훈 0 내가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왜인가. 온전히 기억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이제 나에게 그녀는 손톱 깊숙하게 박힌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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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들의 장소와 환대에 관한 이야기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아작, 2020 이지용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1] “어쨌든 너는 이 세상에 있잖아, 그런데 무슨 진실이 더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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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고 익는 말들
브래디 미카코, 김영현 옮김,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다다서재, 2020+ 백온유, 『유원』, 창비, 2020 김화진 우리가 어떤 것을 믿으며 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각자의 신념 같은 것 말이다. 과거의 나는 신념 같은 건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굳은 생각 같은 건 없는 쪽이 좋다고. 견고하기보다는 유연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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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시
김대주 “달이랑 산책하고 올게.” 아내는 나와 함께 텔레비전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은 휴일이라서 나는 느긋하게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려고 앉았지만 아내는 금세 자리를 뜬다. 나에겐 드라마나 영화를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프로그램을 볼 수 없는 병이 있다. 10년 넘게 방송 일을 하면서 생긴 것인데, 채널을 0번부터 끝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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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의 노동자들
남궁인 응급실을 흔히 지옥이나 시장 바닥에 비유한다. 하루만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목격한다면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고가 모이는 곳이다. 인간들이 내뿜는 각종 불운과 불만, 증오와 오물 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혼란스러운 응급실도 당연히 누군가의 일터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직장으로 택해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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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밀덕이 되었나?
정명섭 덕후의 탄생 덕후의 사전적 혹은 통념상의 의미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뭔가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일본어 오타쿠(お宅 , おたく)에서 유래되었다. 당신 혹은 댁이라는 뜻이다. 언뜻 보면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호회 모임에서 상대방을 지칭할 때 오타쿠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간관계가 아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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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내력 만나기
최현숙 그녀를 만난 내 경로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만 두 살도 되기 전부터 평생을 서울에서만 거주한 내가 28개월을 수원에서 살게 된 이유는, 한 여성 노인의 죽음을 밀착해서 관찰 기록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주변에 농담처럼 “부자 할머니는 어떻게 늙어 죽는지를 기록하려고”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진심이다. 혈연으로 엮인 김에 내 관심 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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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과 뒷장 사이의 우주
문지혁 무엇이든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로마서」 15:4 책장 없는 서재 문을 열자 서재에는 책 기둥이 수북이 솟아올라 있었다. 네 책도 있을 거야. 필요하면 가져가라. 은퇴와 이사를 동시에 앞두고 있는 아버지는 책장을 먼저 처분했다고 말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에 본가에 들렀던 나는 예상치 못한 숙제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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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01 audi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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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02 audi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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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워져서 되돌아가기
피에르 바야르, 김병욱 옮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여름언덕, 2008+ 문목하, 『유령해마』, 아작, 2019 최지혜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야 했던 나날이 있었다. 다 읽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중 다시 읽었으면 좋겠다는 걸 추리는 작업이라 기계적으로 소개 글을 읽고, 표지 글을 읽고, 그래도 불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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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과 ‘지역사회’라는 이중 신화의 중력을 딛고
장애여성공감 엮음, 『시설사회』, 와온, 2020+ 사라 스트리츠베리, 박현주 옮김, 『사랑의 중력』, 문학동네, 2020 오은교 2020년 2월 19일 코로나로 인한 국내의 첫 사망자는 청도의 한 폐쇄병동에서 20년 넘게 거주하던 무연고자다. 두 번째 사망자 또한 같은 시설에 거주한 이로 대학병원으로 이송 중 급작스레 사망했는데, 전해지는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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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레온 페스팅거·헨리 W. 리켄·스탠리 샥터, 김승진 옮김, 『예언이 끝났을 때』, 이후, 2020+ 엠마뉘엘 카레르, 임호경 옮김, 『왕국』, 열린책들, 2018 금정연 #1 확신에 찬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라고 레온 페스팅거는 확신에 차서 서술한다. 그가 검증하고 싶은 것은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확신에 찬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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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사망보험 가입 후 2년 뒤부터 보장됩니다
이랑 등장인물 보랑 보험설계사 이랑 뮤랑 뮤지션 이랑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회의 호스트가 곧 귀하를 들어오게 할 것입니다― 보랑 안녕하세요. 뮤랑 (안녕하세요, 잘 들리세요?) 보랑 안 들리네요. 음성 연결 중이라고 화면에 나와요. 뮤랑 (아, 이거 누르는 건가?) 아아, 이제 들리세요? 보랑 네, 이제 잘 들립니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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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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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식구
황모과 1 “할머니가 갖고 싶다고!” 여덟 살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 초아가 권리주장을 하듯 소원해왔던 생일 선물을 외쳤다. 은영과 금희는 케이크를 자르며 초아의 자못 심각한 얼굴을 들여다봤다. “할머니?” 은영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딸에게 뭐든 다 해주고 싶다는, 무른 심성의 엄마였다. 금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초아를 놀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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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와 라라
장류진 국문과에서 미라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그래서 같은 해에 들어온 동기들과 띠동갑인, 우리 과 역대 최고령 장수생이라는 박미라 언니. 그 유명세는 단순히 나이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니가 학교에서 알려진 이유는 장수생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소유의 자동차, 하얀색 SUV를 끌고 다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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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욱 어젯밤에는 천둥 번개가 쳤어. 비가 내렸지. 추워. 겨울이니까. 겨울이군. 겨울이야. 그런데 몸이 뜨겁다. 잠을 자고 싶은데 수면제도 듣지 않네. 밖에 나가면 햇살이 따뜻할까. 차가울까. 아, 이미 저녁이구나.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더 어두워지면 눈이 올 거야. 어제는 비가 왔는데 오늘은 눈이 내리다니. 그럴 수 있나. 그럴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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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목숨을 구했어
이두온 망설임은 없었다. 타이머와 함께 공기통의 밸브를 돌렸다. 치익, 하고 알루미늄 실린더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준비해 간 마스킹테이프를 작게 찢었다. 테이프에 그려져 있던 미피 얼굴이 반 동강이 났다. 무서운 토끼 얼굴. 그러나 계속 보니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불쌍한 토끼 얼굴을 공기통 손잡이 밑면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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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내가 식당을 연다는 소식을 들은 민구는 카톡으로 웬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개 이모티콘을 보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민구와 정말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사 준 것이었다. - 선미 니는 요리 못하잖아. - 돈도 없고. 민구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지만 나는 식당을 열었다. 열었다기보다 오랫동안 할머니가 운영하다 휴업 중인 작은 식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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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는 것
송기역 # 또 다른 이들 10년 전 ‘실로암종합사회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다. 그때 만난 이들의 꿈은 한결같이 ‘여행’이었다. 한 수강생이 기차를 타고 여수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글로 썼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글감을 제시했을 것이다. 여행은 누군가에겐 인생에 하루뿐인 특별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터뷰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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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생활
서효인 동물 친구와 동물원 동물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이런 시국이 올 것이라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용인 에버랜드에 가는 단란함이 그때 있었다. 이제 말하기의 기쁨을 막 알게 된 둘째의 관심사는 단연 캐릭터와 공룡, 동물 친구들이었다. 캐릭터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공룡은 멸종했으니,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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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세대, 공간
박소현 기억의 뒷면 1 헌책방에 가는 걸 좋아한다. 헌책이 좋다기보다는 사람들의 손을 타면서 만들어진 헌책들의 각기 다른 모양이 좋다. 수도 없이 펼쳐지고 접힌 책들을 보면서 그 책을 한때 소유했던 사람들을 상상하곤 한다. 거칠면서도 연약해진 책의 겉면을 조심스레 펼치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책의 옛 주인이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책장 윗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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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몇 번이라도
차경희 1 입김이 하얗게 새어 나오는 날이었다. 이나리는 고아원을 떠나는 연이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울상을 짓다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연이 언니가 탄 승용차가 출발하자 나리는 혼자 몇 걸음 달려 나갔고 다른 아이들보다 손을 더 높게 들고 작별 인사를 했다. ‘언니, 잘 가’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울음과 함께 속으로 삼킨 얼굴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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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03 audi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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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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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프리퀀시
신종원 처음에는 언제나 어둠뿐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목소리를 기입해도 좋다는 첫 번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어둠은 컬러 차트 위에 펼쳐진 모든 색상 조합식을 통틀어 첫자리에 놓이기에 가장 알맞은 색이다. 수만 가지 빛의 파장이 소리 없이 침몰하는 장소. 흐린 날씨의 밤하늘 또는 외부와 격리된 밀실을 제외하면, 오직 순도 높은 흑연 광물들과 고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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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극장
성해나 이목 씨와 처음 말을 섞은 건 갑작스럽게 울린 화재경보 때문이었다. 7년이 지났지만 경은 그때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영관 안에 화재경보가 울렸을 때, 경은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영화는 결말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사형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단두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영사막에 띄워져 있었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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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먼지
도재경 사흘 만에 실험실 밖으로 나온 서은진은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현기증을 느꼈다. 격자창으로 비껴든 햇살 줄기마다 희붐한 먼지가 어지러이 부유하고 있었다. 서은진은 눈이 부셔 블라인드를 반쯤 내리고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안 깼어.유나의 간병을 도맡아 하고 있는 남편은 언제부턴가 말수가 줄어들었으나 기대를 버리진 않았다. 그건 서은진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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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의 여름
김혜진 1 밤새 비가 내렸다.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선흘 곶자왈 입구에서부터 드라이아이스 건을 쏘며 들어왔다. 그들은 얼굴까지 모두 가린 채 헤드 랜턴을 켜고 있었다. 곶자왈이 축축하게 젖어 암녹색으로 변한 가운데 빨간 불빛이 군데군데 어른거렸다. 불빛 아래로 황색망사점균(학명 Physarum polycephalum Schwein)이 흙과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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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이정식 창문을 열면 이야기를 한다는 건, 물을 머금어 눅눅해진 종이처럼 무겁고 축축해요.당신은 누구인가요?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기억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에요.당신은 무엇을 쓰고 있나요?첫 문장이요.창문을 열면 눈빛이 보여요. 맑은 눈빛이요. 바람 부는 날 처음엔 사람들이 미웠어요. 아무도 내 이야기를 안 들어주니까.무엇이든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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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향해 쓰는 시
에밀리 정민 윤 나는 요즘 점점,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의미는 ‘사랑’이라는 생각을 한다. ‘로맨스’라는 뜻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포스럽고 험준하고 복잡한, 그럼에도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타인과 연대하며, 타자화된 나 자신 또한 보살핀다는 넓은 뜻의 사랑. 그래서인지 나는 한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베풂을 아는 ‘나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심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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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
임철홍 요즘 들어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누군가의 행동을 생김새와 엮어 판단하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인데 나는 별로 믿지 않는다. 매일 마주하는 중범죄 수용자, 성폭력사범, 사기, 조직폭력배 등 그들의 인상에서 각각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업장려금을 열심히 모아서 여동생에게 좋은 선물을 하고 싶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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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없는 우리의 미래가
임현 1 미래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하는 편인데, 구체적인 내용이나 분야가 그때그때 달라지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머지않아 도래할 나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그게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 문제일 때도 있었고, 내년에 있을 대선 결과에 대한 예상일 때도 있었으며, 당장 마감을 해야 할 원고에 관한 걱정이거나 팬데믹 상황이 종료 뒤에야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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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기록 이어받기
샬럿 퍼킨슨 길먼, 이은숙 옮김, 『엄마 실격』, 민음사, 2020+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 『살림 비용』, 플레이타임, 2021 염은영 대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방 벽지를 뜯어내는 것이었다. 내 방엔 유난히 낙서가 많았다. 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낙서가 있는 방. 여자애라고 가장 안쪽 방을 배정받았는데, 이전에 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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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날씨와 지나가는 사람들
박솔뫼, 『미래 산책 연습』, 문학동네, 2021+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획, 이정우 편집, 『광주, 여성 ―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 후마니타스, 2012 박하빈 극장을 빠져나온 뒤에도 여전히 무언가 계속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있다. 그제야 비로소 무언가 시작될 것만 같은 느낌까지 든달까. 수차례의 커튼콜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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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아니)다
루스 베러클러프, 김원·노지승 옮김, 『여공문학―섹슈얼리티, 폭력 그리고 재현의 문제』, 후마니타스, 2017+ 장남수, 『빼앗긴 일터, 그 후』, 나의시간, 2020 김대성 1. ‘문학의 이름’이 아닌 ‘여공의 이름’으로 흩어져 있던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비주류 역사를 문학적 연대기로 묶어낸 『여공문학』은 그동안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이름을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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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벼락, 1년 후
임소라 ▶복권 판매점 : 동행복권 사이트(http://dhlottery.co.kr) ▶ 당첨되신 걸 어떻게 알게 되셨고, 또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라면에 맥주를 마시면서 추첨 방송을 보고 있었습니다. 배우자가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라 집에 강아지와 둘이 있었는데요, 세 번째 숫자까지는 먹으면서 보다가 네 번째 숫자부터 일어났던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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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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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엘리
조남주 강사실에서 원장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영은 학원 전자레인지에 토스트 돌릴 생각을 하니 약간 민망해서 점심 드셨느냐고 물었다. 원장은 집에서 먹고 나왔다며 아영 선생님 안 먹었으면 시켜줄까요? 하고 물었다.“아뇨. 저는 토스트를 싸 왔어요. 근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하나만 싸 왔거든요.”“응. 나 엄청 많이 먹었어요. 신경 쓰지 말고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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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일기
윤성희 1 1년 전에 수미는 미연의 결혼식에 갔다가 부케를 받았다. 수미와 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보건실에서 나란히 누워 있다 친구가 되었다. 그날 수미는 수학 수업을 듣기 싫어서 점심을 먹은 게 체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보건 선생님은 꾀병을 부리는 학생들이 오면 비타민을 한 알씩 먹이고 잠을 자게 했다. 수미가 보건실 침대에 누운지 5분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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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1주년 기념 정기구독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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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
김하리 조안나가 창문을 열었다. 박스 테이프를 자르던 커터 칼을 손에 쥐고 바둑아, 하고 불렀다. 벨이 울린 건 파이프와 벽돌 사이 좁은 틈에서 조안나의 고양이 바둑이가 비에 젖은 얼굴을 내밀었을 때였다. 그녀가 방범창 사이로 팔을 집어넣자 바둑이가 잽싸게 담벼락 위로 올랐다. 벨이 계속 울렸다. 그녀는 칼을 쥔 채로 문을 열었다.—나 옆집 2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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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마니아
김쿠만 믿거나 말거나, 레트로게임이 전 세계의 텔레비전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절이 한때 있었다. 지금의 레트로게임은 짜게 식은 된장찌개나 다름없지만 그 시대의 레트로게임은 팔팔 끓었다고 시게루가 말했다. 시게루는 내가 일했던 레트로게임 카페의 사장이었는데, 정말이지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구직 사이트인 알바몬에다 ‘쉬엄쉬엄 일할 사람 구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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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호
김병운 나는 광호 씨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광호 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요, 하고 뜸을 들일 수밖에 없고, 어쩌다 지금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해도 일단은 잘은 모른다는 말로 운을 뗄 수밖에 없다. 그건 광호 씨라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게이 인권운동을 하는 M 단체에서 함께 활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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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로 꾸는 꿈
사이토 하루미치, 『서로 다른 기념일』,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0+ 정은, 『산책을 듣는 시간』, 사계절, 2018 이미화 지금도 종종 꿈에서 독일어를 한다. 독일에서 지낸 시간보다 한국으로 돌아와 보낸 시간이 더 오래되었는데도 말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독일어를 듣고 말할 기회가 없어서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꿈에서 한두 마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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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김없이 태우기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021+ 메이 사튼, 『꿈을 깊게 심고』, 서재봉·최정희 옮김, 까치, 1999 서윤후 이 지면은 본래 픽션과 논픽션 문학을 각각 선정해 겹쳐보고자 하는 것에 기획의도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내가 고른 두 권은 그 갈래를 결정적으로 구분 짓기 어려운 종류의 책이다. 공통점이라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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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인물들
앙리 베르그송, 『웃음』, 정연복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김홍, 『스모킹 오레오』, 자음과모음, 2020 강보원 『웃음』에서 베르그송이 수행하는 분석에 따르면 웃음은 어떤 딜레마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르그송은 웃음을 “생명에 덧붙여진 기계장치”(p. 52)를 교정하기 위한 사회의 시도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삶과 사회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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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뽀뽀
이아립 “이야옹~.”매일 아침,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떠 처음으로 만나는 얼굴이 있다. 15년째 동거 중인 고양이 ‘나와’의 얼굴인데, 라디오 채널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몇 번의 눈 껌벅임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다 겨우 현실이라는 제로에 수렴할 무렵,“으으으…… 으으……음 어 어 나아아오아야아아.”꿈의 언어인지 동물의 신음인지 모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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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눈뜰 때
정혁용 택배 기사의 일상부터 쓰겠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며 매일 같은 작업의 반복이다. 달라지는 것은 당일 물량의 차이밖에 없다.택배 일은 크게 분류, 배송, 집화,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분류. 각 구에 위치한 본사의 물류 터미널로 허브에서 출발한 간선 차(대형 트레일러) 10~15대 정도가 물건을 싣고 오면(보통 5~8만 박스 내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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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김서울의 공포
김서울 대부분의 괴담, 터부, 공포가 사회적 분위기와 규율과 통제, 인간의 생존 본능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귀신 같은 것을 목격하는 늦은 시간과 스산한 분위기, 혹은 공포영화 속 전반을 이루는 어두운 화면은 밤에 대한 인간의 공포, 홀로 남겨진 공간에서 대응책을 생각하기도 어려운 미지의 생명체의 급습에 대한 공포를 반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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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집의 기록
한승태 #1 현재 다달이 부과되는 TV 시청 수신료는 2,500원이다. 요즘 다들 그렇듯이 나도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만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돈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려서 말해보자면, 나는 인생을 500원 단위로 계산하며 살아왔다. 먼저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그런 건 저희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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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겁도 없이
황현진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감히 겁도 없이.”사람이 사람을 해쳤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엄마의 반응은 대개 그러했다. 내게 그러한 믿음이 없다는 걸 엄마는 내내 마뜩잖게 생각했으니까.신실한 종교인인 엄마에게는 강건한 믿음이 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징과 처벌이 뒤따른다는 것. 그 믿음의 저변에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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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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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쿠스쿠스
조예은 [유리야, 학교 그만뒀다는 게 무슨 소리야?]길게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말풍선 옆의 숫자는 한 시간 전을 가리켰다. 본가에서 이 10평짜리 원룸까지는 한 시간 반가량이 걸린다. 내가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꾸는 거였다. 엄마가 멋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번호키를 바꾼 후에는 냉동 만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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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카타
정선임 다다미 두 장 반짜리 방 구석구석 아슴푸레한 새벽빛이 스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진이 선물해준 달력. 한 장 한 장 뜯어 쓰는 일력이다. 한 면을 가득 채운 8이라는 숫자와 金이라는 한자 아래 ‘라디오 생방송 전화 인터뷰, 오후 5시 35분’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라디오’와 숫자뿐이지만.“옛날에는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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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리
임성순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홋카이도에 가기로 한 것은 일종의 예행연습이라고.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유럽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횡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정일 뿐 뭐가 필요한지, 어떤 준비를 하면 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 연습 삼아 일단 이웃 나라에 가기로 한 것이다. 다녀오면 뭐가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화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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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의 사랑
박유경 다희가 우주에게 우리 헤어졌어, 말하면 우주는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할 때 우주는 우즈베키스탄 플랜트 공사 현장으로 나갔다. 우즈베키스탄은 도시 간 이동 금지와 출입국 금지 조치를 강하게 시행했고 우주는 현장에 격리된 것과 같은 상태로 1년 넘게 휴가를 나오지 못했다. 우주에게 페이스톡이 와서 받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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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커
구병모 당시 동행했던 친구 지혜의 말에 따르면, 다정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기 전 신원 미상의 사람과 조금 세게 부딪쳤는데 이는 인파에 부대낀 피치 못한 접촉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이 굳이 다가와 일방적으로 구타한 것에 가까웠다고 한다. 다정과 지혜는 승강장에서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이었고, 신도림행 열차가 도착한다는 차임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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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뇌가 경험하는 것들
엘이에저 스턴버그,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조성숙 옮김, 다산사이언스, 2019+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억』 1 · 2, 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2020 이수정 수학, 과학에 재능이 있거나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던 내가 어쩌다 이과로 진학해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까지 하고는 10년 넘게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이공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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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하는 '목소리들'에서 벗어나기
콜센터상담원,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콜센터 상담 노동 이야기 』, 코난북스, 2021+ 코니 윌리스, 『크로스토크』 1 · 2, 최세진 옮김, 아작, 2016 심완선 통화 예절 중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화 건 사람이 끊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내용이 있다. 통화를 시작한 사람이 용건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이다. 지하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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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믿는 것이 '세계'를 믿는 일
백영경 · 나영 외,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후마니타스, 2018+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자음과모음, 2021 강소영 이현석의 첫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 말미에는 “참고한 내용과 약간의 덧붙임”이라는 제목의, ‘참고’의 비중이 아니며 ‘약간’의 분량도 아닌 꽤 상세한 부기(附記)가 실려 있다. 주(註)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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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농담
김태연 보라보라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내가 제일 걱정했던 건 가족의 부고를 듣는 일이었다. 직항이 없는 건 물론이고, 경유 편도 며칠에 하나씩 있는 먼 곳에서 그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빠의 문자를 받았을 때, 두려움이나 슬픔보다 다른 감정이 먼저 들었다. 안도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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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모른다는 건, 글을 배운다는 건
김태호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창비, 2019)엔 ‘묵자의 세계관’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묵자’란 ‘점자’의 상대어로 비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문자를 일컫는다. 한글, 가나, 알파벳이 묵자다. 비시각장애인에게 묵자란 말은 다소 낯설다. 볼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이 표현이 쓰일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은 상식에 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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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
박준 시와 산문을 쓰며 살아가고 있지만 쓰는 일은 매번 어렵기만 합니다. 기억과 마음을 들여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고 해도 그다음 날이면 다시 새로운 백지를 마주해야 하니까요. 유난히 쓰는 일이 버겁고 두렵게 느껴지는 날이면 저는 공연히 책상 정리를 한다거나 손톱을 다듬는다거나 오래된 일기장을 펴 보는 일로 쓰기의 시간을 유예합니다. 삶은 새롭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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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서서
이연철 1 휴대전화 속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귀를 세운다. 오감을 동원한다. 새벽 2시. 전화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주변 상황은 어떤지, 술이나 마약을 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떠한지. 휴대전화로 전해지는 목소리와 주변 소음을 통해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를 재빨리 판단한다. 일단, 새벽 2시니까 위험도가 높다.“방금 모자를 날렸어요. 제가 아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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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들에겐 집이 필요하다
천운영 너를 처음 만난 건 네 엄마를 통해서였다. 말 그대로 누군가의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상태. 임신한 몸으로 예술대학 신입생으로 들어온 30대 여자. 그녀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소로 너는 존재했다. 질감 혹은 예감 같은 것. 그것으로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고.팔다리가 무척 길쭉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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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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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미래
편혜영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힘주어 주먹을 쥔다.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이. 마치 그리로 돌아가 아들을 막아주기라도 할 것처럼.“손이 빨개요.”아이의 말을 듣고서야 주먹의 힘을 뺀다. 의식하지 않으면 힘을 빼기가 어렵다.“맛은 괜찮니?”나는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문 아이에게 물었다.“뭐, 괜찮은 것 같아요.”아이가 우적거리며 대답했다. 맛있다는 건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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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획이 있으셨겠죠
이경희 로그라인 : 촉망받는 SF 소설가 이경희는 어느 날 자신이 쓴 소설 속 캐릭터들에게 납치되고,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 죄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안녕하세요, 편집자님. 간만에 뵙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 어제도 야근하셨구나. 그건 그렇고, 일단 제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네? 이상해요? 뭐가 이상한데요? 아니에요. 저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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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질 듯 말 듯 도도하게
명학수 두 달 전이었나. 집 근처 주택가의 좁은 도로를 지나다 다리에 피를 흘리며 걷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고양이는 세 발로 겨우 제 몸을 버티고 있었다. 출혈 중인 우측 앞다리는 차마 땅에 딛지도 못하고 공중에 머문 상태여서 보행은커녕 직립조차 힘겨워 보였다. 흙먼지가 엷게 쌓인 보도블록 위로 떨어지던 붉은 핏방울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무심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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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파티
김애란 며칠 전 이연은 성민으로부터 ‘다음 주 주말에 혹 시간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자기가 ‘아는 대표님 댁에서 홈 파티가 열리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요즘 방역 상황이 안 좋아 인원이 많지는 않고, 대략 대여섯 명 정도 모일 거’라면서. ‘누나도 알고 지내기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고 평소보다 말을 늘였다.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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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
김나현 1 토요일이라 이모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보건소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점심을 먹은 직후였다. 보건소로 방문해 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이었다. 이모는 부랴부랴 옷을 입고, 마스크를 두 개 겹쳐 쓰고, 걸어서 보건소까지 갔다.전날 이모가 들른 반찬 가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가 나온 탓이었다. 이모는 보건소를 다녀와서 할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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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이후, 새로운 말들이 묻고 있는 것
김홍모,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창비, 2021 +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 위고, 2017 장은영 실어 사람들이 기울어진 복도에 앉아서 구조를 기다릴 때 선내에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배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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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쓰다
희정, 『두 번째 글쓰기―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 』, 오월의봄, 2021+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장성규 ‘노동’이라는 말이 낯선 시대다. 왠지 모르게 촌스럽고, 투박하고, 나와는 거리가 먼 말인 듯하다. 온갖 화려한 기호들이 범람하는 텍스트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노동이라니?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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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한 본성은 왜 자주 드러나지 않는가
짐 디피디,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장상미 옮김, 갈라파고스, 2021+ 임솔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 문학과지성사, 2021 김성광 미국 영공은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로부터 즉시 착륙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비행기는 괜찮습니다. 우리 비행기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뉴펀들랜드 갠더공항에 착륙할 예정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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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이즈 블루
홍칼리 나는 갇혀 있다. 어젯밤 이곳에 수갑이 채워진 채 실려 왔던 게 기억난다. 미친 게 아니라고 애원하다가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서 비명을 질렀던 것도. 비명을 지르자 경찰들이 내 입을 막았다. 소리를 지르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경찰이 내 입에서 손을 뗐다. 경찰차 안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미카엘에게 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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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두 손과 입술로
최지혜 2014. 04. 16.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도착하니 학년 부장 선생님께서 굳은 표정으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수학여행 가던 애들이 탄 배가 기울었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먼저 들어온 선생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 앉아 실시간 뉴스를 검색했다. 뉴스 사진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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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간 것
주나영 나는 중동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한다. 이곳에는 132개국에서 온 승무원이 있다. 나는 한 달에 100시간 남짓 비행기 안에서 근무한다. 비행기는 장소 감각이 없는 비장소다. 모두가 익명이고 무국적이어도 무관하다. 기차나 버스와 달리 국경에서 검문이 없다. 비행기는 국경을 쉽게 넘나들고 경계를 부수며 빠르게 이동한다. 이렇듯 어디든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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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장혜령 7년 전 『진주』란 제목의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고 제주 강정에서 열린 텐트 연극 워크춉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자신을 표현하던 자주연습 시간 노트북에 있던 『진주』를 읽으면 좋겠다던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때 그 원고가 내게 없었다면 아마 나는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와 모리를 만날 수 없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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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기록
이유 내가 그곳의 이름을 듣게 된 건 더 이상 그곳에 다니고 있지 않을 때였다. 누군가에게서 그곳에 대해 듣게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했다.뭔데 그러느냐고 나는 소리쳐 물었고 당신은 빨리 와보라고만 했다. 나는 뒤집개인지 국자인지를 손에 든 채 주방에서 거실로 달려갔다. 당신이 가리키는 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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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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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령
전건우 윤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갔다. 나는 병원에 떠도는 소독약 냄새와 누군가가 고통을 씹어 삼키다 끝내 토해내고 만 비명의 조각들을 지독하게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고, 우리는 서로의 임종을 지켜봐 주기로 오래전에 약속했으니까. 그 약속을 할 때 윤수와 나는 꽤 어렸다. 죽음 같은 건 머나먼 미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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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농장
성혜령 한동안 연락이 없던 진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화면에 뜬 진화의 이름을 보고 기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진화라는 사람을 까맣게 잊고 있던 것처럼. 기진은 밤사이 업데이트된 유튜브 영상을 보려던 참이었다. 방은 한낮임에도 어두웠다. 암막 커튼 사이로 얇게 스며든 빛이 침대를 칼날처럼 가로질렀다. 기진이 구독 중인 유튜버는 목에 상처를 입은 채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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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된 시신은 땅에 유용한가
나푸름 고아는 동생이 죽은 지 보름 만에 나타났다. 우리 가족은 그때까지도 슬픔에 빠져 있었다. 엄마는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출근했지만 제대로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퇴근 후에는 저녁도 거른 채 안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고 방에서는 몰래 술을 마셨다. 나는 수시로 학교를 빠졌으나 엄마는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그럴 여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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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깜빡임, 여름 숲
김태용 * 이 소설은 신종원 소설가의 단편 「고스트 프리퀀시」(『고스트 프리퀀시』, 자음과모음, 2021), 박지일 시인의 시 「립싱크 하이웨이」(『립싱크 하이웨이』, 문학과지 성사, 2021)의 영향 아래 쓰기 시작했다. 두 작가는 나의 제안으로 2021년 3월 19일 오후 5시, 연기백 미술가가 임대해 사용 중인,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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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가는 길
김숨 “미선 씨, 논산은 처음이라고 했지요?”4차로를 시속 100킬로로 달리는 트럭 적재함은 비어 있다. 고속도로는 빛으로 가득하다.내일 함께 논산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경수가 미선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건 지난밤 9시 경이었다. 출장 애견미용사인 미선은 마침 예약된 일이 없었다.“살림이 많아요?”“내 트럭에 다 싣고도 공간이 남으니까 적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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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재현과 허구적 틀
이호연, 유해정, 박희정, 『당신의 말이 역사가 되도록』, 코난북스, 2021 + 신시아 라일런트 글, 캐드린 브라운 그림, 신형건 옮김,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보물창고, 2004 선우은실 누가 무엇을 말하는가.자아와 시대의 요청이 일치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 문학은 세계에 대해 위와 같이 물었다. 대문자 정치의 의제가 해소되고 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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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없는 자기기술지를 위하여
디디에 에리봉, 이상길 옮김, 『랭스로 되돌아가다』, 문학과지성사, 2021+ 박서련, 『호르몬이 그랬어』, 자음과모음, 2021 박인성 디디에 에리봉의 저작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자기서술을 기반으로 하는 에세이 문학이 전세계적인 트렌드로 떠오른 현 시점에 상당히 중요한 참조점이 되어준 저작이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도 자서전도 아니다. 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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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의 상상력이 남긴 것
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페스트의 밤』, 민음사, 2022+ 파올로 조르다노, 김희정 옮김,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은행나무, 2020 남승원 30년지기 친구들 아홉 명과 SNS로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40대라는 나이가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대화가 활발히 오가지는 않는다. 1년에 두어 번 만나는 날을 전후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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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보낸 하루
권은민 남북한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때 법률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이 글은 나의 미래 이야기다. 2030년 가을에 내가 평양에 간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다. 2030년 가을 오전 10시, 평양 조선중앙변호사협회 회관 조선중앙변호사협회 회관 내 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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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않아도 될 웃음들
김준연 그 마음, 저도 알 것 같아요.비문해 성인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원일이 한 말이었다. 원일은 한국인 아버지와 몽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외모는 여느 한국인과 다를 바 없어서,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힘들다. 늘 나른한 투로 말하는 원일은 한글을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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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지도
정혜윤 내 인생을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친구가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내 친구는 현재 리스본에 체류 중이다.“어떻게 지냈어?”“바빴어.”“왜?”내 친구는 아마존을 방문했다가 아마존 카리푸나족 원주민 추장을 만난 일이 있다. 2019년의 일이다. 나는 카리푸나족이라는 부족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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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의 자궁
이반지하 레즈비언 중에서 ‘부치’는 남자고, ‘펨’은 여자다.하지만 부치의 중심부에도 아들을 낳기 위한 자리가 있다. 문장을 끝맺기조차 민망한 이 부조리함을, 늦지 않게 글로 빚어놔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절은 분명 겨울에서 봄을 향해 부지런히 피어나고 있었지만, 또래 부치들의 자궁은 가을 낙엽처럼 하나둘 앞다투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혈기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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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땅
민병훈 ✽ 임금이 속리사(俗離寺)에 행행(行幸)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00석, 노비(奴婢) 30구(口), 전지(田地) 200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 세조실록 32권, 세조 10년(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2월 28일 신해 1번째 기사 ✽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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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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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일요일
차현지 1 지갑을 잃어버린 걸 알아차린 그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고, 양양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주말 근무를 끝낸 이현이 일요일 저녁 늦게 서울로 올라왔을 테지만, 이번에는 내가 양양에 가기로 했다. 양양 시내 근처에 있는 신축 매물이 제법 괜찮은 가격으로 나왔다며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이현이 자신의 SUV를 끌고 양양에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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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시우스 아마레
오선호 처음에는 여기가 깊은 바다, 물속인 걸 몰랐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사후 세계라 오해했다. 임소임으로서의 기억이 고스란했으므로, 95세로 수명을 다한 이후 육체를 떠났으나 아직 흩어지지 않은 그녀의 의식일 거라 짐작했다.위에서 공히 생략된 주어는 ‘나는’이다. 내가 이제 곧 사라질 망자의 의식이라 착각한 탓에 감히 나를 나라고 여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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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안과 함께하려면
배명훈 김조안에게 연락하는 방법은 나에게 연락하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컴퓨터로 이메일을 보내거나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당연히 컴퓨터에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휴대전화로 이메일을 보내도 좋다.) 바로 답이 오지는 않겠지만 그건 나한테 연락할 때도 마찬가지다. 평범하게 소셜미디어에 근황을 올려두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이건 특히 김조안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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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빛
문진영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이자카야 구석 자리에서 마지막 잔을 앞에 두고, 그 애가 물었다. 혀가 조금 풀려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아까보다 더 또렷했고, 표정에는 생기가 넘쳤다. 1차로 갔던 양꼬치 집에서만 해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함께 소주 세 병을 비우는 사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그 애는 오로지 소주만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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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식 문답
권여선 정원의 20주기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나는 부영과 경애를 초청했다. 둘 다 들어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올리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읽는 것 같지도 않더니 잠시 뒤 경애가 대화방을 나갔다는 알림이 떴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 모르기도 했다. 나는 부영이 먼저 나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부영은 계속 나가지 않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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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믿는 순간
보니 가머스, 심연희 옮김, 『레슨 인 케미스트리(1・2)』, 다산책방, 2022+ 룰루 밀러, 정지인 옮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2022 이상화 나는 몇 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내 안의 물음표들이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되는 현상을 겪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과 자기 의심이 강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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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지 않을 이유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플레이타임, 2018+ 제시카 놀, 김지현 옮김, 『럭키스트 걸 얼라이브』, 놀, 2022 배윤지 이웃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교 근처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푸근한 외모를 지닌 할아버지 점장은 가난한 유학생을 어여삐 여겨 흔쾌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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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에 대한 직전이다 아직*
범유진, 『두메별, 꽃과 별의 이름을 가진 아이』, 자음과모음, 2021+ 이희영, 『챌린지 블루』, 창비교육, 2022 김정택 우리는 항상 성장을 시도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한창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땐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지만 문득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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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침 소리가 듣기 싫어진다면
천용성 화면을 살짝 기울였다 세운다. “안전하게 송금완료. 3,000,000원.” 문자 수신을 알리는 녹색 배너가 내려온다. “+82 1577-8000 [Web 발신] 신한09/11 17:12…….” 입력창을 누르고 메시지를 입력한다. “미안한데, 난 이제 형이랑 같이 못 살겠어. 보증금 빼줄 테니까 새 집 알아봐. 말하기 싫으니까 말 걸지 말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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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증언
이주영 [INTRO] ‘10월 항쟁’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 건 지난 1월의 어느 저녁, 서대문의 작은 교회에서였다. 소박한 기도 모임이 끝난 후 프랑스 테제 공동체의 신한열 수사님이 내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 유럽에서 머물다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온 수사님은 내게 1946년 10월, 대구에서 있었던 항쟁을 아느냐고 물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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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것이 아닌 힘
박영진 [들어가며]친구와 남성성에 대한 얘기를 잠깐 나눈 적이 있다. “남자 문제는 단순하지. 이기거나, 지거나, 빌붙거나, 초월하거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가 할 법한 재담이라고만 여겼다. 친구의 분류가 호주 사회학자 코넬이 『남성성/들』에서 말한 네 가지 남성성의 유형에 거의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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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통의 편지
권창섭, 정지향 시인 권창섭과 소설가 정지향이 형제/자매 자살 유가족으로서 경험한 애도 과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1. 지향이 창섭에게우리는 함께 아는 친구가 많았습니다. 창섭 씨와 제가 처음 만난 건 동료 작가 A의 집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였습니다. 불광천에 면한 그 좁은 방에 밤새 많은 사람이 오갔습니다. 몇 번이고 모자란 술을 사다 나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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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은 것과 읽고 싶은 것
안미옥 며칠 동안 바람이 많이 불었다. 당장 큰비가 올 것 같은 바람이었다. 창문을 열자 태풍이 도착하기 전인데도 바람이 한순간에 집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랗고 무거운 바람이었다. 그리고 아주 큰 구름. 크고 무거운 것은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언제나 긴 잔상을 남긴다. 요즘은 이런 바람과 구름을 자주 만나게 된다. 기후위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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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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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는 맛
최민우 민경완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안대를 쓰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취침 준비에 들어갔다. 시외버스가 출발하자 차 안은 바퀴 달린 수면실로 변했고, 마흔다섯 개의 좌석을 꽉 채워 앉은 장거리 출퇴근 직장인들의 잠에 취한 날숨이 마스크를 뚫고 귤빛 조명이 어둑히 빛나는 버스 천장으로 올라갔다. 옆자리 여자는 고개를 꾸벅이다 제풀에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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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밤, 푸른 돌
임선우 1 범인은 근처에 있다빌라 CCTV 좀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추적추적 비 내리는 여름밤, 나는 빌라 화단 앞에서 집주인 겸 빌라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사고 났어요?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지 집주인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장국영이 사라져서요. 장국영이 사라졌다고요? 아, 제가 기르는 야자나무 이름이 장국영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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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고난에 처하사
윤치규 여섯 살 가을에서 일곱 살이 되던 봄까지 이창균은 보육원에 잠시 맡겨진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작 반년도 안되는 기간이었다. 유년기에는 그때를 지워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기억은 잊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선명해졌고, 결과적으로 그 시기가 이창균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되었다. 첫날 방장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며 이층침대의 위층과 아래층 중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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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1늦은 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입구는 철저하게 봉쇄돼 있었다. 방호복을 입고 보호 장비를 갖춘 직원이 문 앞에 앉아 나를 막아섰다.“지금은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 말을 하려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 직원이 막아서면 어떻게 말해야만 하는지 형에게 이미 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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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김남숙 현철을 생각하면 파주가 생각난다. 파주를 생각하면 현철이 생각나고. 나는 창밖으로 머리를 쭉 뺀 채로 현철을 생각하며 귓가를 긁적인다. 주변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귓가는 긁으면 긁을수록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머리통 언저리에 생긴 구멍에서 모래가 자꾸 떨어지는 소리. 현철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귀를 긁적거렸으려나.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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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만 데려갈 수 있다면
김경욱 필호에게 죽음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높이에서 덮쳐왔다. 11미터, 지면에 부딪히는 순간 추락 속도가 정점에 이르는 높이. 5층 빌라 건물이 대략 그 정도였다. 정작 필호는 무슨 일을 당한지도 몰랐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이었고 쓰레기봉투에는 먹다 만 족발이 들어 있었다. 캔 맥주를 홀짝이며 프로야구 중계를 보다 일전에 남긴 먹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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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은 스타일리스트들
토머스 드 퀸시, 유나영 옮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워크룸프레스, 2014+ 에드거 앨런 포, 김석희 옮김,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열린책들, 2021 이수은 밀실에서 벌어진 참극. 목격자들의 증언은 부조리하고, 납득할 만한 동기는 보이지 않는다. 공권력은 허둥거리며 단서를 찾아 사방을 들쑤시지만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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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를 위한 과학 공식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문학동네, 2014 + 해리 클리프, 박병철 옮김, 『다정한 물리학』, 다산사이언스, 2022 강대건 머리가 한참 굵어지던 사춘기 시기, 난,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알면 알수록 너무나 무서웠다. 나는 삶이 롤러코스터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르고 비명을 지르게 만들지만 결국 이것의 목적은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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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하는 영혼들의 산보
찰스 디킨스, 이은정 옮김, 『밤 산책』, 은행나무, 2014+ 페터 한트케, 홍성광 옮김,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2010 강건모 몇 해 전 제주로 이주하고서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 내가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울에 살 때도 종종 걷기는 했는데, 이만큼은 아니었다. 요사이 거의 매일 밤 10킬로 정도를 걷는다. 그동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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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를 부수는 사랑
김나리 어플을 열면 현관 안쪽 풍경이 정면으로 보였다. 얼마 전 우리 집 거실을 볼 수 있는 펫캠용 CCTV를 설치해 뒀다.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 도착하기 직전인 밤 10시 즈음이었는데, 별생각 없이 핸드폰으로 CCTV 어플을 열어보았다. 우리 강아지 단포쉬는 뭘 하고 있으려나. 강아지 전용 방석에서 단잠을 자고 있으려나. 어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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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문화예술활동 '하기'
최윤경 대구로 돌아온 지 7년이 됐다. 시간이 흐르면 이곳에 더 익숙해져야 할 텐데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서울을 오가는 횟수가 점점 더 늘었다. 서울에서 살다 대구로 올 때만 해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 몰랐다. ‘광역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도시 아니던가. 우연히 고개 돌린 길목에서 작은 갤러리를 발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극장 옆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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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아둔 그곳, 열두 시간 이야기
서은혜 저녁 7시 20분. 업무상 교육 일정이 잡혀 있어 기차를 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꼭대기 층, 서른 평 남짓한 집에 들어가니 초등학생 막내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방 문을 열어보니 녀석이 불도 켜지 않고 침대 위에 몸을 옹크리고 있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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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가 오기까지
김현아 1이 모든 일은 그날 엄마가 장터에 가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 안에서 연희는 생각한다. 내가 장에 가니 예수 믿는 사람이 전도하기를,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하고 모든 환란을 면한다 하니 내가 예수를 믿어 너희 형제에게 환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던 엄마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니 또삼분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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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이현석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셀저(Richard Selzer)는 1974년에 첫 작품 『수술의 의식(Rituals of Surgery)』을 출간했다. 46세에 첫 책을 출간한 이 소설가에게는 직업이 하나 더 있었다. 작품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일반외과 전문의였다. 의원을 운영하는 개원 의사이자 대학병원 겸임교수으로 일했던 셀저는 57세에 퇴직